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동기 시대 (문단 편집) == 여담 == * 16~19세기 중반의 유럽에서는 무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화약의 위력이 매우 크게 발전하였는데, 주로 사용하던 철제 화약 무기의 성능이 그 위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청동으로 만든 장비를 대량으로 주조한 적이 있었다. 화약 무기는 밀폐가 잘 돼야 성능이 오르고, 밀폐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밀하게 제조해야 한다. 헌데 철의 경우 주조 난이도가 높다보니 당시 기술력으론 청동으로 만드는 것이 주조 난이도가 낮은 만큼 정밀하게 만들 수 있었고, 그만큼 성능도 더 높았다. 게다가 화포의 강한 반동을 이겨내기 위해선 무작정 튼튼하기만 해선 안되고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질겨야 하는데, 기존의 무쇠는 이 부분이 취약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취성]] 때문에 그대로 깨져 버린다. 그렇다고 전근대에 제대로 된 탄소강, 즉 [[강철]]을 만들기에는 기술적으로 대단히 힘들어서 대체품으로 청동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청동을 달리 포금(砲金, gunmetal)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무기사(武機史)에서는 이 시기를 제2의 청동기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 사유 재산과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사냥꾼이나 가정 주부와 달리 전문 지식 또는 기술로 일정한 소득을 공급 받는, 인류 최초의 전문 직업이 생긴 시기이기도 하다. 식량의 유통과 축적이 가능하여 수렵, 채집, 농업, 살림 외의 인류의 활동이 전문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기술자, 예술가, 광대, 상인, 사채업자, 매춘부, 정치인, 종교인, 군인, 건축가, 약탈꾼, 노예, 요리사 등이 존재한다. * 청동기 시대의 미라들을 연구하면 종종 발견 지역(매장 지역)과 성장기를 보낸 지역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나, 동서양 혼혈인인 경우가 발견된다. 일반적인 생각보다 장거리 교류가 빈번한 시대였으리라고 추정되며, 이는 사유 재산의 발달로 인해 매우 활발한 정복 활동과 무역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정선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인골의 유전자 조사 결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0197450|백인, 그것도 영국인 DNA가 나온]] 적이 있다.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로 진출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은 [[토하라인]] 뿐이었으므로, 이들 출신자 중에 일부가 무역이나 탐험 등의 목적으로 [[한반도]]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주류 학계는 해당 유골을 조사하던 연구진들 중에 [[영국인]]이 있었다는 점에서, 연구진의 DNA가 조사 과정에서 실수로 섞여들어가서 생긴 해프닝으로 추정하고있으며, 연구진들 스스로도 그 가능성을 의식해 자신들의 이론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좀더 분명한 청동기 시대 인류의 광범위한 이동의 증거는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의 급격한 확산인데, 기원전 4000년경에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캅카스]] 북부 지역에서 처음 발원한 이들은, 불과 2000년만에 [[중앙아시아]] 전체를 차지하여 [[안드로노보 문화]], [[박트리아-마르기아나 문화]] 등을 이루고 [[인도 아대륙]]까지 진출해서 갠지스 문명을 건설했고, 기원전이 끝나기 전에 [[유럽]] 전체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철기 시대]]에 접어든 [[히타이트|히타이트인]]들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가 기원전 2000년경인데, 아직 청동기 시대를 살고있던 친척 민족들이 중앙아시아를 제패한 게 이 시기보다 4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분류:고고학]][[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